[소설처럼 - 다니엘 페나크] 소설처럼 청춘하면 좋겠네

[소설처럼 - 다니엘 페나크] 소설처럼 청춘하면 좋겠네

    안녕하세요. 오늘은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에 대해서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한 문장을 이해하는 데에도 갖은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하는 어려운 고전과

    생소한 단어들이 난무하는 전문도서 사이에 묻혀서 쩔쩔매는 독서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마저도 지치게 만듭니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산악인의 마음으로 겨우 한 권의 책을 정복하고 나면,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난해한 책들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환영인사를 보내고 있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들을 애써 모른척하고 고개를 돌리면 나의 책장 반대쪽에서는 새로 출간되는 전문도서들이 산사태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 둘러 쌓여서 책을 꾸역구역 붙잡고 있다보며 독서라는 것이 참으로 재미없고 소모적인 노동으로 인식되고야 맙니다. 아마도 오늘 날 젊은 세대에게서 독서가 결핍되어 가고 있는 현상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고 살아가는 데에 고민하기도 바쁜데 또 하나의 숙제와 같은 책을 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찾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순간에도 "소설처럼"은 어렵고 의무적인 독서로 지친 청춘들에게 책 읽기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과 희열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한 책입니다.

     

    다니엘 페나크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어릴적 기억을 떠올려줍니다. 사실 어린 시절 우리는 모두 책 읽기를 사랑했고, 어쩌면 하루 중에서 책 읽는 시간을 가장 기다렸을지도 모릅니다. 잠들기 전 부모님께서 머리맡에서 읽어주시던 책은 하나같이 재밌는 것이어서 졸린 눈을 애써 일으키며 조금만 더 읽어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었죠. 

     

    우리는 어느새 책의 이야기 안으로 완전히 빠져들었고, 직접 그 책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주인공을 열렬히 응원하는 지원군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은 또 얼마나 절묘했는지 모릅니다. 주인공이 사나운 용을 마주쳤을 때, 악당이 속임수를 꾸미고 있을 때, 이어지는 이야기를 내일로 기약하는 부모님의 전략은 너무나도 효과적이어서

    우리는 빨리 내일이 오기를 바라며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는 꿈 속에서 저만의 상상을 펼치며 소설 속 인문들과 또 하나의 평행 세계를 살아 보기도 했지요. 그 당시 우리는 모두 진정으로 책과 사랑에 빠져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는 언제부터 책과 싸우게 되었을까요? 이 비극적 결별은 책 읽기가 '숙제'로 그 신분을 바꾸어 등장하면서부터일 것입니다.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부모님께서 머리맡에서 읽어주시던 책 읽기 시간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돌아오는 것은 '숙제'로 주어지는 책 읽기였습니다. '독후감'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들고 찾아오는 책은 더 이상 예전에 우리가 사랑에 빠졌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부터는 더 이상 책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어서 주인공이 되거나 지원군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온통 독후감에 대한 부담감이 가득했기 때문에 책 속으로 깊이 빠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책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에 바빴고, 인물들을 하나씩 심층 분석하느라 상상력은 동원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설처럼의 저자 다니엘 페나크는 이렇게 우리 모두가 경험한 책과의 첫사랑의 실패를 집어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책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방법을 슬그머니 제시합니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읽고 싶은 만큼 읽으며, 읽고 난 이후에도 그에 대해 아무런 결과물을 내놓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은 어찌나 매력적으로 들리는지, 인문학을 전공하여 학창 시절 내내 책과 씨름한 저에게는 현실 속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마음속에 묘한 울림이 한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소설을 읽는 방법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확히 말하자면, 저자는 그 '방법'마저도 사라지기를 바라지만요.)

     

    오늘날 우리네 젊은이들은 삶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희망적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청년들이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 시각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헬(hell)조선, 탈조선'등의 말이 유행해 왔다는 것은 그런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어렸을 때 지금처럼 삶에 대해서 비관적이지 않았다. 그 당시에 우리는 미래를 상상하며 즐거워했고, 장래희망을 발표할 때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자유롭고 당당하게 꿈을 외쳤다. 

     

    그럼 청년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우울한 가면을 쓰게 되었을까요? 학교의 장래희망 기입란에 '부모님의 희망'을 적는 것이 그 시작은 아니었을까요? 그때부터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을 꿈꾸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기준과 세상이 제시하는 것에 의해서 '해야 하는 것'을 위해 살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이 그치고, 읽어야 하는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 시작된 것처럼 말입니다. 책 읽기에 대한 내용의 책을 읽었을 뿐인데, 어릴 적 삶에 대한 향수가 일어나고 어린아이 때처럼 꿈꾸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드는 것은 왜일까요?

     

    사회의 기준과 기대에 맞춰 마치 '독후감'을 쓰는 것처럼 사는 삶으로 너무 오랜 어린 시절을 보낸 것 같습니다. 청춘은 야속하게도 자꾸만 뒤로 지나가고 있는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 일을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청춘은 너무나 멀게만 느껴집니다. 하지만 참 다행입니다. 이제 저도 소설처럼 '청춘'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한 줄 리뷰!]

    "어른이 되고 나면 왜 아무도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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